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살인 사건 (문단 편집) == 사건 내용 == [[1997년]] [[8월 30일]], 범인 전현주(당시 28세, 여성, 1969년생)는 [[서울특별시|서울]] [[잠원동]] 뉴코아백화점(현 [[뉴코아아울렛]]) [[버거킹]]에서 [[콜라]] 한 잔을 구입해 마시며 서성이던 도중 [[영어]] 학원의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귀가하던 피해자 박초롱초롱빛나리(사망 당시 초등학교 2학년, 만 7세, [[1989년]] [[ 9월 8일]]([[음력]] [[8월 8일]]) 생)를 목격하고 구슬려서 소품 제작실 겸 창고로 사용하던 사당동의 지하 창고로 유인해 유괴하였다. 그리고 당일 저녁 총 3차례에 걸쳐 피해자의 부모에게 [[공중전화]]를 통해 2천만 원의 몸값을 요구하였다. 전현주는 첫 번째 협박 전화를 한 뒤 피해자인 나리 양에게 사탕이라고 속여서 [[수면제]]를 먹였으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나 울면서 집에 보내 줄 것을 애원하는 피해자를 목 졸라 살해했다.[* 대부분의 유괴 사건의 경우 범행 당일에 피해자가 살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사례로는 윗 문단에서 언급한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부터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 그리고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이 있는데 이 중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의 경우는 범인 [[정성현(범죄자)|정성현]]이 우예슬, 이혜진 양을 납치해 [[성폭행]]을 시도하려다가 저항하자 살해한 케이스다.] 이후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로 나리 양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긴 후 시신을 등산용 배낭에 담아 창고의 출입구 쪽 계단 밑에 방치했다. 유괴 다음 날, 전현주는 [[명동]]의 한 커피숍에서 피해자의 부모에게 전화상에서 말한 액수의 금액을 준비하고 오라는 내용의 전화를 하던 중 발신지 추적으로 들이닥친 경찰의 검문에 걸렸다. 경찰은 전화가 걸려온 지 9분만에 신속하게 전현주를 포위했지만, 커피숍에 있던 13명의 사람(여자 12명, 남자 1명)을 검문하다 [[언더도그마|임신 8개월 상태인 전현주가 설마 범인이겠느냐]]며 놓아 버리게 되었다.[* 물론 21세기의 기준으로 본다고 치더라도, 임산부가 어린이 유괴 사건을 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당연하겠지만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때에 생기는 충격이 현재보다 훨씬 심했다. 게다가 상황이 급박해진 전현주는 "아기가 배를 차서 몸이 좋지 않다"며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여주어 동정을 사려고 했고, 후술하듯 그녀의 후배들이 형사들에게 "임산부에게 이래도 되느냐"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비공개 수사 중이어서 자세한 설명을 할 수도 없던 경찰 입장에서는 무리해서 임산부를 수색하기보다는 그냥 놔 주자는 판단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혐의점을 증명할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만삭 임산부를 체포하거나 했다가는 인권침해 논란으로 비화될 수 있기도 했다.(이 당시는 [[문민정부]] 후반기 시절이어서 그 이전처럼 경찰이 용의자는 몽땅 잡아가서 취조하거나 할 수 없었다.) 후술되지만 경찰은 차선책으로 이 당시 주요 용의자들을 미행하며 수사하고 있었다.] 심지어 엉터리 몽타주까지 만들어내 전국에 뿌려댄 탓에 10만 장의 종이가 휴지조각이 됐다. >하태신 서장 (서초 경찰서): 임산부라는 말도 듣지 못했고 또, 같이 동행한 사람들이 신원을 확인하면서 항의를 하고 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전부 다 돌려보냈습니다. 현장에서의 체포는 결국 실패했으나 대신 차선책으로 '''상기된 카페에 있던 13명 모두에게 형사들을 미행으로 붙여''' 조사했고, 전현주가 용의선상에 있었기에 경찰은 이미 집 주변을 수사 중이었는데 이를 지켜보며 의아해한 전현주의 아버지 전모 씨가 9월 11일 경찰에 자신의 딸(전현주)이 범행 직후인 9월 1일부터 가출 상태임을 알렸다. 또 경찰에게 협박범의 목소리가 자기 딸의 목소리라고 증언했다. 결국 통화 내역으로 꼬리를 잡힌 전현주는 9월 12일 신림동의 한 여관에서 검거되었다. 결국 '''전현주의 부모가 신고했는데''' 자신의 딸이지만 어린이 유괴 살해는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였기에 부모들도 결국 등을 돌리고 만 것이었다. >'''참으로 애절하고 비통한 심정입니다. 살아서 부모품에 안기길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박나리 양은 [[죽음|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늘 확인됐습니다. 천금 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 심정으로 지금부터 이 박나리 양 유괴 사건 속보 전해드립니다.''' > - 박나리 시신 발견 당일 [[KBS 뉴스 9]] [[류근찬]] 앵커의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77650|오프닝 멘트 중에서]] 검거 당시 전현주는 [[임신]] 상태였으며, 그 해 2월에 결혼식을 올린 상태였다. [[행정안전부|내무부]] 산하기관에 근무하던 [[고위공무원단|고위]] [[공무원]] 출신 아버지를 둔 전현주는 유복하게 자랐으며, 본래 의사나 작가를 지망하고 있었으나 본인의 의지와 달리 [[협성대학교]]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970913001098|무역학과]]를 거쳐 응급구조학으로 전공을 바꾼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사건 2년 전인 25세 당시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해서 총학생회 간부를 맡기도 했다. 커피숍에서 검문에 걸린 상태에서 전현주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서울예대 후배들이 경찰에게 임산부를 거칠게 대하지 말라며 항의하는 통에 경찰이 풀어준 것도 이 때문인데, 전현주가 범인으로 밝혀지자 서울예대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는데 비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사건과 아무 관계 없는 서울예대생들이 학교를 못 다니고 휴학을 해야 했을 정도였다.[* 당시 서울예대 남산 캠퍼스는 명동역에서 직선거리로 200m에 위치해 있을 만큼 가까웠다. 연락만 된다면 몇 분 안에 도착 가능한 거리.] 전현주는 사치와 [[지름신|낭비벽]]이 심한 터라 결혼 후 3천만 원의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유괴를 계획했다. 박나리 양의 어머니 한영희씨는 범인의 검거 소식에 딸을 찾을 수 있으리라 굳게 믿으며 경찰서로 달려가 취재진들 앞에서 감사 기도까지 하였지만, 머지 않아 딸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충격에 빠지고 사당동 어디냐고 외치며 넋을 잃은 그 모습이 지상파로 전국에 방영되었다. 당시 박나리 양은 서울원촌초등학교[* [[반포자이]] [[초품아|단지 내에 있다.]] 사건 당시에는 반포주공 3단지였으며, 재개발로 인해 휴교했다가 2009년 재개교했다. 단 박나리 양은 당시 반포주공3단지가 아니라 길건너 한신8차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한신8차 아파트도 사건 이후 재개발로 철거되었다.] 2학년 5반에 재학 중이었는데,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원촌초등학교의 학생들은 분노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전현주의 자백에 따라 창고를 수색한 경찰은 등산용 가방에서 심하게 부패한 박 양의 시체를 발견했다. 유괴 소식에 [[PC통신]]을 중심으로 박초롱초롱빛나리 찾기 운동이 벌어졌고 지상파 뉴스에서도 범인의 육성을 들려주며 캠페인에 동참했다. 단독 범죄로 결론났으나 남편은 물론 박나리 양의 유족들까지도 전현주의 체포 직후부터 전현주의 단독 범행을 믿지 않았으며 의문을 제기했다. 전현주가 체포될 때 남편은 망연자실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고 한다. 이후 사건 현장인 사당동의 지하 창고에서 그가 범행 당시의 상황을 재연할 때[* 여담으로 이 날은 1997년 9월 17일로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현주야 사실대로 말 해! 너 아니잖아, 임마! 시키는 대로 했잖아!" 라고 울부짖는 남편의 절규가 지상파에서 방영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